2009년 1월 4일 일요일

끝까지 남은자의 축복

한국교회 설교문을 읽었다… 그 부분들을 입니다.

끝까지 남은 자의 축복

열왕기상 19장 15-18절
<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때로는 심판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성도에게 무엇보다 큰 축복의 조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후퇴하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가면 매도 있고, 길도 막히고, 고난도 있어야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경건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 매를 대지 않고 감싸주기만 하면 아이들이 버릇이 없어집니다.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너무 떠받들어 키워서 버릇이 없고 예의도 없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매도 들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는 때로 부모가 무섭게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처럼 어른 무서운 줄 알고 자라는 아이가 건강한 아이입니다. 어른을 우습게 아는 아이는 결코 좋은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줄 아는 성도가 건강한 성도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 성도들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식 성도들 중에는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무식해 보이지만 부모님 세대 신앙인들이 훨씬 지혜로운 분들입니다. 사실 지옥 가는 것이 무서운 줄 알아야 우리의 삶을 깨끗이 지킬 수 있습니다. 지혜 중의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은 공평하고 정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일은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보는 태도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큰 돈이 생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옳은 것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고,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 대로 반드시 심판하시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으면 그 다음엔 더 나은 때와 기회가 반드시 주어질 것이고, 적절한 때에 축복의 문이 반드시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혼자 대결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곧 왕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엘리야는 비전을 잃고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조그만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힘을 얻어 40일 동안 걸어 호렙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호렙산 굴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때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0절과 14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두 번이나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데 배신자들이 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오직 저만 남았고 저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같은 말은 두 번이나 반복합니까? 이 말씀을 보면 왜 엘리야가 그처럼 영적 고갈상태에 빠졌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남아있는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느낌처럼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은 본문 15-18절 말씀에서 엘리야에게 엄청난 사명을 주십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키라. 그리고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해 선지자가 되게 하라.”
그런 엄청난 사명과 함께 그가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께서 혼자 남았다고 생각한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 명을 남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엘리야는 용기를 얻고 19절 말씀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떠나 다시 사명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 남은 자 7천명이 되는 길 >
요새 한국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그런 때에 큰 일을 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생각하면 가끔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7천 명의 의인이 있음을 믿고, 우리 자신이 그 7천 명의 남은 자 중에 속해야 합니다. 우리 몇 사람이라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남은 자 가운데 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뚜렷한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가끔 목적지가 없이 드라이브를 할 때가 있습니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어도 인생의 차를 몰 때에는 반드시 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목적지가 없는 드라이브를 해도 차가 잘 빠지면 기분이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가끔 차가 꽉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분 좋은 마음은 사라지고 “왜 드라이브를 떠났나?”하는 후회가 생기고 돌아갈 길을 찾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목적지가 있는 드라이브와 목적지가 없는 드라이브는 차이가 있습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아무리 가는 길이 힘들고 장벽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로 갑니다. 요새 무슨 일을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엇인가 일을 시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비전을 향한 발걸음은 잠시의 흥분과 기대감으로 그냥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보스톤 마라톤에서 가장 힘든 코스가 있습니다. 그곳은 뉴튼 거리에 있는 하트 브레이크 언덕입니다. 그곳을 달리면 너무 숨이 차고 심장이 파열되는 것 같다고 해서 하트 브레이크 언덕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곳은 전체 코스에서 약 3분의 2쯤 되는 지점으로 그곳에서 대개 선수들의 우열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때 그곳에서 앞서는 선수들은 미리 그 언덕을 어떻게 잘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준비하고 전략을 짠 선수들입니다.
그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준비하면 인생의 하트 브레이크 언덕을 만나도 오히려 그때가 오히려 내가 남보다 앞설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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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복음을 전파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서 큰 상급을 얻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성공도 해야 하고, 자녀도 잘 키워야 합니다. 또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떤 대가도 치르려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비전은 없습니다.
때로 거룩한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신나는 일이 적어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꿈과 사명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지지를 보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아무 일도 하기 싫고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사명을 생각하고 다시 거룩한 목표를 향해 일어서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된 자리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2.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7천 명이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이방신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알 신은 돈 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희생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또한 돈을 사모하면 잘 미혹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근심도 많아지고, 결국은 돈이 자신을 찔러 죽이는 칼이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얼마나 많은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기도의 능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돈으로 다 해결되는 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1장 2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돈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결국 돈 때문에 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면 잠깐 형통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생명력이 막혀서 열매가 없게 됩니다. 또한 돈을 사랑하면 진리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옛말에 “돈이 말하면 진리는 침묵을 지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진리와 명예를 팔고, 몸과 마음을 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 신에게 우리의 영혼을 팔지 말고,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우리의 영혼을 팔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성도들 중에서도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외적인 것에 현혹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약 10년 전에 시골에서 참깨 농사를 하던 한 부부가 서울로 올라와 시중에 판매되는 참기름을 먹어보고 통탄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참기름이 낙화생 기름을 섞거나 저질의 수입 깨를 섞어서 만든 가짜 참기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토종 참깨로 참기름을 짜서 같은 가격에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익이 적어도 그렇게 신용을 지키면 손님이 많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부가 만든 참기름 맛이 이상하다고 소문났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가짜 참기름을 먹고 살아와서 진짜 참기름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진짜 복음은 가짜 참기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필요를 채워주는 백화점식 목회 프로그램들이 복음을 대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보다는 외적인 것을 좇아서 쇼핑하듯이 교회를 다니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그저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세의 증거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말씀보다는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말만 좇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말씀이 실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성도들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은 잘 듣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먼저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무리 하나님 말씀과 예배가 중요하다고 백 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행동을 보고 부모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교회에서 성경퀴즈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하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학교에서 1등 했다고 하면 이웃에게 알리고 좋아서 난리가 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자녀 마음에 “우리 부모님은 믿음이 최고라고 말하지만 진짜로는 학교에서 1등 하는 걸 기뻐하는구나!”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예배 중심적인 삶, 교회 중심적인 삶을 우습게 알게 됩니다. 그런 모습들이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말고 항상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자기를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남은 의인 7천 명은 숨겨진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조용한 곳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숨은 의인들처럼 우리는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겸손하게 자기를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결국은 사람 앞에서도 높임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도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중국 위나라에 편작이란 당대의 최대 명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편작의 두 형도 의사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왕이 편작에게 “세 형제 중에 누가 가장 의술이 좋은가?”고 물었습니다. 그때 편작은 대답 했습니다. “맏형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 형님이 그 다음입니다.” 그러자 왕은 이상하다는 듯이 편작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대를 천하 최고의 명의라고 하는가?”
그때 편작이 말했습니다. “맏형은 의술이 너무 뛰어나 환자의 얼굴만 보고도 병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예방해줍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형이 큰 병을 막아준 것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둘째 형은 맏형보다는 못하지만 병세가 미약할 때 미리 다 치료해 줍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둘째 형이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저는 병이 커진 후에야 비로소 알아보고 치료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를 큰 병을 치료해준 것으로 생각해서 제가 명의로 소문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성도들은 누가 병을 고쳤다고 하면 드러난 것만 보고 최고의 목회자라고 생각하고 우르르 몰려듭니다. 그러나 진짜 최고의 목회자는 신앙의 병이 들지 않고 마음의 병이 들지 않게 미리 말씀으로 잘 인도하는 목회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은밀하게 숨어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어떤 위대한 성취를 해도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자세히 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처럼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알면 결코 어떤 자랑도 할 수 없고, 특별히 자신의 신앙이나 인격이나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대전에 계시는 한 목사님이 심방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하는 집사님이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때 제대로 길을 돌아가려면 한참을 가서 신호를 받아 돌아와야 하는데 운전하는 집사님이 그냥 그 자리에서 중앙선을 침범해서 유턴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집사님에게 “그래도 됩니까?”라고 하니까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다 그래유!”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차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 딱지를 떼였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쁜 일이 있었던지 경찰이 안 잡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 한 심방대원이 말했습니다. “할렐루야! 목사님! 하나님께서 경찰의 눈을 어둡게 하셔서 우리를 못 보게 하셨네요.”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무척 당황하며 “우리 교회에서 신앙이 좋다는 심방대원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고 생각하고 아주 실망했다고 합니다.
가끔 누군가 신앙이 좋다는 말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는 다 비슷한데 “내가 신앙이 좋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살 수도 없고 남을 쉽게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돌아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있는 척하고, 경건한 척하고, 착한 사람인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 부족함이 노출되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4. 신앙과 사명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아합 왕 시대는 흑암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의를 버리고 세상과 타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7천 명은 끝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고 어떤 부조리를 경험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우리의 신앙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우리를 가장 낙심하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이 형통하게 잘사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가끔 우리의 신앙에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왜 악인이 형통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잠깐 동안은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그 형통함 때문에 죄를 자각하지 못하고 영원히 망하게 됩니다.
치사율이 높은 병에는 대개 자각 증상이 없습니다. 암도 초기에 발견되면 삽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 병원에 가보면 대개 때가 늦은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한 것은 암이 걸렸는데 느끼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죄가 있으면 그 죄를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저의 길을 막아주소서!”
성도가 죄가 있고 잘못된 길로 나갈 때 길이 막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때 형통하게 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멀리했는데도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면 잠깐은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통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현재 사는 것이 힘들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맡은 사명을 이루고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고난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시골 교회에서 목회할 때 전도사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추운 겨울에 땔 나무도 없고 쌀도 다 떨어져서 첫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함께 그 날 저녁을 금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한 집사님이 쌀 한 말을 놓고 갔습니다. 그것으로 밤늦게 상을 차린 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식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큰 교회 목사로 호강할 때보다 그때의 모습이 가장 칭찬받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 끝까지 남은 자의 축복 >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고 있다면 현재 고난이 있고, 축복과 보상이 없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사명을 붙들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면 곧 극적인 반전의 때가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에스더를 보면 모르드개가 암살 음모를 알려 아하수에로 왕의 생명을 구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일등 공신에게 아하수에로 왕은 상 주는 것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상은 놓쳤지만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얼마 후에 모르드개가 당시 정계의 실력자인 하만에게 밉보여서 날이 밝으면 장대에 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궁중 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한 사건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상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왕은 모르드개에게 상을 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날이 밝자 무슨 상을 줘야할지 고민하는 왕에게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는 일로 방문했습니다. 그때 왕이 하만을 불러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물었습니다.
하만은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자기인줄 착각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왕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수레를 잡고 상 내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 수레에 태워 하루 종일 ‘우리 임금님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하신다’고 외치며 온 성을 돌게 하십시오.” 왕은 그 기막힌 아이디어에 탄복하며 말했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네가 왔으니 잘됐다. 네가 고삐를 잡고 모르드개를 태워서 성을 돌도록 해라.”
얼마나 극적인 반전입니까? 왜 우리가 좋은 일을 해도 즉시 상이 없고 즉시 형통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더 좋은 상을 받고, 위급한 때에 극적으로 역사하시기 위해서 잠시 보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악인이 형통한 경우도 있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악은 악대로 의는 의대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환경에 우리의 모든 인생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만 바라보면 우리는 수시로 낙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를 낙심하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 곁에 아무도 없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 꼭 누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감춰두신 7천 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다 있는 처소에서 빛을 발하면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사역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한 7천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이 되고, 그런 분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명을 위해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숨은 일꾼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루고 남은 자의 축복을 얻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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