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4일 일요일

진정한 감사

승동교회의 설교 말씀에서 인용합니다.

합 3:16-19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옛날 어느 곳에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인접해 있는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한쪽 편 마을의 이름은 감사촌이었고, 또 다른 한쪽 편 마을의 이름은 불평촌이었습니다.
감사촌 마을 사람들은 말 그대로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봄이 되면 나뭇가지에 움돋는 싹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 나뭇가지에 무성한 잎들을 바라보면서 또 감사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열매들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비록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래도 땅 속에는 그 뿌리가 살아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산봉우리를 보면서도 감사할 줄 알았고, 낮은 골짜기를 보면서도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고생스러워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시련을 당하면 당할수록 오히려 그들의 감사에 대한 농도도 더욱더 진해졌습니다.
그러나 불평촌 마을 사람들은 정반대였습니다. 우리가 숨을 내쉴 때마다 탄산가스가 내뿜어지듯이 그들은 입만 열면 불평과 불만, 원망과 탄식이 끊이지를 아니했습니다. 물론 이따금씩 좋은 일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촌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다시금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지레 겁을 집어먹고서 걱정부터 먼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잠시 볼일이 있어 나룻배를 타고서 감사촌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감사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는 대단히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야! 세상에 이렇게 사는 법도 다 있구나!"
그래서 그는 그 날 온종일 감사촌 마을 사람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열심히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날 만큼은 그도 감사촌 사람들과 더불어서 열심히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는 볼일을 다 마치고 다시금 나룻배를 타고서 자기 마을인 불평촌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마을로 되돌아오자마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에이, 감사촌에 가서 얻어먹은 것도 없는데 괜히 실컷 감사만 하다가 돌아왔네!"
그러면서 또 불평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평촌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감사가 되지를 않습니다. 감사촌에 사는 사람만이 감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감사촌으로 이사가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감사촌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감사촌으로 옮기기 위해서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서 완전히 빈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촌에서는 철저하게 무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사람만이 진정한 감사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보세요. 그러면 옷 한 벌, 밥 한 끼도 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불평이 있습니까? 내게 지금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야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진정한 감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진정한 감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연 감사할 조건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감격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골방에 들어가서 중얼거리듯이 아무도 보지 못하게 독백으로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는 19절 끝 부분에 있는 것처럼 수금에 맞추어서 감격 가운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영장을 위하여, 큰 악단장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만백성이 보는 가운데 큰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 옛날 하박국 선지자에게 있었던 이 감격, 이 감사가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박국 선지자가 과연 어떠한 때에, 어떠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고 있을 때는 결코 평안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환난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곧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러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범죄한 유다를 치시기 위해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무섭고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은 표범보다도 더 빠르고 이리보다도 더 사납습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땅에 있는 먹이를 발견하고서 쏜살같이 움켜쥐기 위해서 내려오듯이, 바벨론의 기병들이 곧 유다를 침몰하기 위해서 올 것이라는 것을 하박국 선지자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는 바벨론과 맞붙어 싸울만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하박국 선지자가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입술이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 안에 있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했습니다. 온 몸의 뼈마디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줄 압니다.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나 한 사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라에 위기가 찾아와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라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하박국 선지자처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박국 선지자가 환난을 눈앞에 두고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걱정, 근심, 두려움을 거룩하게 승화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주석가 가운데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하루는 골목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실컷 얻어맞았습니다. 그 뒤 인사불성이 된 채 길바닥에 내팽겨 졌습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온 몸이 쑤시듯이 아팠습니다. 겨우 기어가듯이 움직여 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는 잠시 가족들을 진정시키고 난 뒤에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는 강도를 당했음에도 기도의 첫 마디를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다섯 가지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1) 비록 제게 있던 것을 다 빼앗겼지만, 귀한 생명만큼은 지켜주셔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2) 제가 지금껏 한 번도 강도 당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서나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3) 아울러 이번 일을 통해서, 제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면서 살 수 있도록 저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4) 만약에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저도 강도와 같은 범죄자가 되었을는지도 모를텐데 저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5) 마지막으로 제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저로 하여금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Think and thank)!"
여러분, 힘들고 어려움에 처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언제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 가운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지금 하박국 선지자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환난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바벨론이 유다를 짓밟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유다는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에 무슨 무화과, 포도, 감람, 밭의 식물, 외양간의 소가 남아있겠습니까? 현실은 비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위대한 접속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절 끝 부분에 있는 "없을지라도"입니다.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놓는 참으로 위대한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 말씀을 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내 주 예수 모신 곳에는 그 어디에나 하늘 나라에 기쁨이 있기 마련입니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작가 펄벅(Pearl Buck, 1892∼1973)의 대표작 "대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농사꾼 왕룽과 그의 아내 아란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심히 땀흘리면서 농사일에 전념을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만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 길이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왕룽은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에 있는 큰 도시로 이사가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구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리어카 하나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남편 왕룽은 앞에서 끌고 아내 아란은 뒤에서 밀며 행상을 했습니다. 고생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내 아란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남편이 자기와 늘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땀흘리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고마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 부잣집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왕룽은 자기가 일평생 동안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엄청난 돈을 손에 쥐게 됩니다. 그리고 아란은 값비싼 보석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땅도 사고, 큰 집도 사고, 머슴도 부리면서 부자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풍요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아란에게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 왕룽이 여유가 생기니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급기야는 첩을 들여 앉혔습니다. 그리고 본부인 아란을 부엌으로 내쫓아 버리고 오히려 첩을 안방에 앉혔습니다. 심지어 아란이 가지고 있던 보석을 강제적으로 빼앗아서 첩에게 주기까지 했습니다. 아란은 첩 때문에 매일매일 슬픔 가운데서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란이 밥상을 차려서 남편과 첩이 있는 안방에 들여보내 놓고 자기는 대충 부뚜막에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서러운 나머지 흐느끼면서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차라리 그 때가 더 좋았는데······  "
여러분, 그 때가 언제입니까? 가난하게 농사지으면서 살았던 때가 더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리어카를 끌고 자기는 뒤에서 밀던 그 때가 오히려 더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가난했습니다. 풍요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 때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난이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풍요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배반하고 나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무시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나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의 감사가 우리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박국 선지자가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지 살펴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가장 힘있고 능력있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는 기도는 어떠한 기도이겠습니까?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4:6에서 이러한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은 감사하면서 드리는 기도를 언제나 기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19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 선지자는 두 가지를 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환난을 이겨낼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슴은 높은 곳을 잘 올라갑니다. 사슴은 높은 곳에 다닐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습니다. 피곤해 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 선지자는 이제 곧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두려움에 떨지 말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박국 선지자는 환난을 회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지 이스라엘에 가면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동네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 거주합니다. 그래서 "산 위의 동네"라고 합니다. 비록 곧 바벨론에 의해서 산 위의 동네들이 짓밟힘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슴이 높은 곳을 자유롭게 밟고 다니는 것처럼, 산 위의 동네들이 다 회복이 되어서 그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든 일을 당하셨습니까? 환난 가운데 처해 있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계십니까? 그럴수록 우리도 감사함으로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자를 어려움에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뜻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옛날 하박국 선지자는 환난 속에서도 큰 감격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잊고 지내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억만금을 드린들 그 예물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액수의 과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가 착한 농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특별히 무우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 무우가 얼마나 큰지 어린 아이의 몸체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고을원님의 선정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제일 큰 무우를 뽑아서 원님에게 갖다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원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기특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속을 불렀습니다.
"여보게, 요즘 관가에 들어온 것 중에 좋은 것이 없는가?"
"예, 큰 황소가 최근에 한 마리 들어왔습니다."
"그래? 그것 좋구만! 그것을 저 농부에게 주어라!"
그래서 농부는 무우 하나를 바치고서 큰 황소를 선물로 받아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이웃집에 아주 마음씨가 나쁘고 고약한 농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속이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흑심을 품었습니다.
"앞집 사람은 무우 하나를 가져다 바치고서 황소 한 마리를 받아 왔으니까, 내가 만일 우리 집에 있는 황소 한 마리를 바치면 원님이 적어도 논 몇 마지기 정도는 하사하시겠지?"
그래서 그는 몇 해 동안 공들여서 키운 황소를 끌고 원님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원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님의 덕분으로 황소가 이렇게 잘 자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원님에게 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원님은 황소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속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요즘 관가에 들어온 것 중에서 좋은 것이 없는가?"
"예, 일전에 들어온 무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 그것 좋겠구만! 그러면 그 무우를 농부에게 주어라!"
그래서 그 농부는 큰 황소를 갖다 바치고서 어쩔 수 없이 무우 하나를 얻어 가지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어떠한 마음으로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민담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감사, 참된 감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려야 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같은 죄인까지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건강주시고, 금년 한 해도 주 안에서 무사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진실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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